1부 — 여정 JOURNEY
하버드 심리학 교수 리처드 앨퍼트가 사이키델릭 연구로 대학에서 쫓겨나고, 인도에서 스승 님 카롤리 바바(Neem Karoli Baba)를 만나 람 다스로 다시 태어나기까지의 자전적 이야기다. 부제는 "변모(The Transformation)". 유일하게 일반적인 산문으로 쓰인 부분으로, 뒤에 이어질 가르침이 어떤 삶에서 나왔는지를 보여 주는 서사적 입구 역할을 한다.
지금 여기에 있으라
하버드 심리학 교수가 인도의 스승을 만나 다시 태어나기까지 — 반문화 시대의 가장 유명한 영적 고전을, 원문과 번역과 해설로 한 장씩 짚어 읽는다.
«Be Here Now»(1971)는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교수였던 리처드 앨퍼트(Richard Alpert)가 인도에서 바바 람 다스(Baba Ram Dass)라는 이름을 얻고 돌아온 뒤, 자신의 변모 과정과 스승에게 배운 가르침을 엮어 낸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한 사람의 저작이라기보다 공동 창작물에 가깝다. 뉴멕시코의 영성 공동체 라마 재단(Lama Foundation) 구성원들이 람 다스의 강연 녹취를 함께 편집하고, 손으로 그린 그림과 캘리그래피로 지면을 채워 완성했다. 처음에는 소책자 묶음 형태로 배포되었고, 1971년에 지금과 같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출간 이후 이 책은 크라운 출판사(Crown Publishers)를 통해 널리 유통되었고, 1977년 여름 라마 재단은 저작권과 수익의 절반을 람 다스가 세운 하누만 재단(Hanuman Foundation)에 넘겨 책이 만들어 낸 에너지가 교도소 아쉬람 프로젝트, 임종 프로젝트 같은 봉사 활동으로 이어지게 했다. 누적 판매는 200만 부를 훌쩍 넘겼고, 이 책은 1970년대 반문화(counterculture)를 대표하는 고전이 되었다.
이 책의 역사적 의미는 뚜렷하다. 사이키델릭 실험의 한계에 부딪힌 한 세대에게, 약물이 잠깐 보여 준 의식의 지평을 요가·명상·헌신 같은 오랜 수행 전통으로 지속할 수 있다는 다리를 놓아 준 것이다. 인도의 구루(guru), 만트라(mantra), 사다나(sadhana) 같은 개념이 서구 대중문화의 어휘로 자리 잡는 데 이 책이 한 역할은 매우 크며, 오늘날 명상과 마음챙김 문화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어김없이 이 책과 만나게 된다.
책 전체를 꿰뚫는 문장은 "Remember, Be Here Now" — "기억하라, 지금 여기에 있으라"이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계산은 마음이 지어낸 것일 뿐이며, 실제로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이다. 앞에 붙은 "Remember"는 이 단순한 진실을 우리가 끊임없이 잊어버린다는 사실, 그래서 수행이란 결국 '다시 기억해 내는 일'이라는 통찰을 담고 있다.
There are three stages in this journey that I have been on! The first, the social science stage; the second, the psychedelic stage; and the third, the yogi stage.
내가 걸어온 이 여정에는 세 단계가 있다. 첫째는 사회과학의 단계, 둘째는 사이키델릭의 단계, 셋째는 요기의 단계다.
"Be Here Now"라는 말은 람 다스가 인도를 여행하던 시절, 길잡이가 되어 준 미국인 구도자 바그완 다스(Bhagwan Das)에게서 처음 들은 것이다. 앨퍼트가 과거의 기억이나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는 "그냥 지금 여기에 있으라"고 답했다. 이 짧은 권유가 책의 제목이 되었고, 나아가 한 시대의 표어가 되었다. 제목은 명령문이지만 그 어조는 강요가 아니라 초대에 가깝다.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수행 전통이 서로 다른 언어로 가리켜 온 하나의 지점이라는 것이다.
책 자체의 물리적 이력도 제목만큼 상징적이다. 아래 인용이 보여 주듯 이 책은 상업 출판의 산물이 아니라 공동체의 손에서 시작되어, 판이 거듭될수록 그 수익이 다시 봉사와 수행의 자리로 돌아가는 순환 구조 속에 놓여 있었다.
BE HERE NOW was originally distributed in pamphlet form by Lama Foundation and was subsequently published by Lama Foundation as this book, more than 928,300 copies of which have been distributed by Crown Publishers to date.
«BE HERE NOW»는 본래 라마 재단이 소책자 형태로 배포하던 것으로, 이후 라마 재단이 지금의 단행본으로 출간했으며, 현재까지 크라운 출판사를 통해 92만 8,300부 이상이 유통되었다.
하버드 심리학 교수 리처드 앨퍼트가 사이키델릭 연구로 대학에서 쫓겨나고, 인도에서 스승 님 카롤리 바바(Neem Karoli Baba)를 만나 람 다스로 다시 태어나기까지의 자전적 이야기다. 부제는 "변모(The Transformation)". 유일하게 일반적인 산문으로 쓰인 부분으로, 뒤에 이어질 가르침이 어떤 삶에서 나왔는지를 보여 주는 서사적 입구 역할을 한다.
책의 심장에 해당하는 "핵심의 책(The Core Book)"이다. 갈색 재생지 위에 손글씨와 그림이 소용돌이치는 독특한 지면으로, 읽는 책이라기보다 통과하는 경험에 가깝다. 제목은 생명 에너지가 낮은 차원(빈두, bindu)에서 영적 에너지(오자스, ojas)로 변형된다는 요가의 관념에서 왔으며, 형식 자체가 선형적 사고를 흔들어 놓도록 설계되어 있다.
부제 그대로 "의식적 존재를 위한 안내서(A Manual for Conscious Being)"다. 명상, 만트라, 호흡, 음식, 공부 모임인 사트상(satsang) 등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수행법을 요리책처럼 조목조목 정리했다. 2부가 비전이라면 3부는 방법이다. 영감은 구체적 실천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이 책의 균형 감각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더 읽을 책들을 안내하는 주석 달린 도서 목록이다. 제목은 "그림에 그린 떡은 배고픔을 채우지 못한다"는 선(禪)의 격언에서 왔다. 책은 어디까지나 지도일 뿐 여정 그 자체가 아니라는 자기 성찰적 경고를, 책의 맨 마지막 부에 배치한 셈이다. 독서가 수행을 대신할 수 없다는 이 책다운 마무리다.
«Be Here Now»의 1부 "Journey"는 하버드 심리학 교수 리처드 앨퍼트(Richard Alpert)가 바바 람 다스(Baba Ram Dass)가 되기까지의 자전적 회고다. 람 다스 자신이 서두에서 이 여정을 세 단계로 정리한다. 첫째는 사회과학의 단계, 둘째는 사이키델릭의 단계, 셋째는 요기(yogi)의 단계다. 세 단계는 단절이 아니라 누적이다. 앞 단계의 경험이 다음 단계의 전제가 되고, 당시에는 무의미해 보이던 사건들이 나중에 필수적인 준비 과정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는 이것을 연꽃이 피어나는 과정에 비유한다.
이 이야기의 또 다른 특징은 시선의 방향이다. 화자는 언론이 다루는 사건의 외면이 아니라 "이 모든 경험을 통과하는 한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1부는 성공의 정점에서 시작해 지적 환멸, 약물 체험의 절정과 추락, 인도에서의 재구성으로 이어지는 내면의 궤적을 따라간다. 오늘의 독자에게 이 장들은 한 개인의 회심기이자, 1960년대 미국 반문화가 동양 사상으로 방향을 트는 과정을 압축한 문화사적 기록으로 읽힌다.
1부의 서문 격인 짧은 장이다. 제목 "our-story"는 history를 비튼 말장난으로, 이것이 한 사람의 전기(his-story)가 아니라 같은 길 위에 있는 이들이 공유하는 이야기(our-story)라는 선언이다. 람 다스는 자신이 통과해 온 세 단계를 제시하고, 각 단계가 다음 단계를 준비시키는 구조였음을 밝힌다.
주목할 점은 그가 무엇을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선을 긋는가다. LSD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도, 대중 잡지의 선정적 보도도 아니다. 이 거리두기는 책 전체의 어조를 결정한다. 약물은 이 서사에서 목적지가 아니라 통과 지점으로 다뤄진다.
There are three stages in this journey that I have been on! The first, the social science stage; the second, the psychedelic stage; and the third, the yogi stage.
내가 걸어온 이 여정에는 세 단계가 있다. 첫째는 사회과학의 단계, 둘째는 사이키델릭의 단계, 셋째는 요기의 단계다.
1961년 3월, 스물아홉 살의 리처드 앨퍼트는 학문적 경력의 정점에 있었다. 하버드의 네 개 학과에 적을 두고, 예일과 스탠퍼드의 연구 계약을 쥐고 있었으며, 케임브리지의 골동품 가득한 아파트, 메르세데스 세단, 세스나 경비행기, 요트를 소유했다. 미국식 "성공한 사람"의 삶을 목록 그대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장의 핵심은 성공의 목록이 아니라 그 목록을 바라보는 회고의 시선이다. 그는 자신이 진짜 학자가 아니라 학계라는 게임의 능숙한 플레이어였다고 고백한다. 5년간 2만 6천 달러를 들인 정신분석조차 신경증을 해소하지 못했고, 분석가는 마지막 날 "당신은 분석을 떠나기엔 너무 아프다"는 말을 남겼다. 외형의 완성과 내면의 공허 사이의 낙차가 이후 모든 사건의 출발점이 된다.
But what all this boils down to is that I was really a very good game player.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요약하면, 나는 그저 아주 능숙한 게임 플레이어였다는 것이다.
My lecture notes were the ideas of other men, subtly presented, and my research was all within the Zeitgeist
내 강의 노트는 교묘하게 포장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었고, 내 연구는 전부 시대정신의 틀 안에 있었다.
불만의 해부가 이어진다. 심리학 이론은 강의실 안에서만 작동했고, 그와 동료들은 "9시에서 5시까지의 심리학자"로 일한 뒤 출근 전과 똑같이 신경증적인 상태로 퇴근했다. 학생과 교수가 서로의 역할을 완벽하게 연기하는 강의실은 그에게 방음실처럼 느껴졌고, 치료자로서는 환자가 자신의 이론에 맞춰 길들여지는 과정을 목격했다. 알지 못한다는 자각, 그리고 앞으로 40년을 그렇게 모른 채 살게 되리라는 은근한 공포가 이 장의 통주저음이다.
전환의 계기는 복도 끝 벽장을 개조한 작은 사무실에서 온다. 그곳에 티모시 리어리(Timothy Leary)가 있었다. 두 사람은 술친구가 되고 함께 강의를 개설한다. 1960년 여름 멕시코 쿠에르나바카에서 리어리는 "신들의 살"이라 불리는 버섯을 먹었고, 앨퍼트가 도착했을 때 남미 여행 계획은 이미 무의미해져 있었다. 찾고 있던 것이 바깥이 아니라 자기 머릿속에 있음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But there was still that horrible awareness that I didn’t know something or other which made it all fall together.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나로 꿰어 줄 무언가를 내가 알지 못한다는 끔찍한 자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I learned more in the six or seven hours of this experience than I had learned in all my years as a psychologist.
이 예닐곱 시간의 경험에서 나는 심리학자로 살아온 모든 세월 동안 배운 것보다 더 많이 배웠다.
1961년 3월 6일(원문 기준), 그해 최대의 눈보라가 치던 밤, 뉴턴에 있는 리어리의 집 부엌에서 앨퍼트는 실로시빈(psilocybin) 10밀리그램을 삼킨다. 몇 시간 뒤 홀로 앉아 있던 그의 앞에 학위복을 입은 자기 자신, 즉 "하버드 교수인 나"가 나타나 분리되어 나간다. 사교가, 첼리스트, 조종사, 연인이 차례로 떨어져 나가고, 마침내 평생의 기본 정체성인 "리처드 앨퍼트임" 자체가 사라진다. 그리고 몸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공포가 절정에 달한 순간, 내면에서 조용하고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묻는다. "그런데 가게는 누가 보고 있지?" 모든 정체성과 몸이 사라졌는데도 여전히 온전히 깨어서 이 드라마 전체를 침착한 연민으로 지켜보는 "나"가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 신체적 정체성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그 자리의 발견이 이 장의 사건이다. 새벽 5시에 눈을 치우며 웃는 그를 보고 창가의 부모마저 미소 짓게 만든 일화는, 제도와 불화하면서도 내면의 확신을 신뢰하는 이후 행보의 씨앗으로 제시된다.
뒷부분은 실험의 확장을 다룬다. 동료 과학자들과의 언어가 갈라지는 과정, 약 200명에게 실로시빈을 주고 반응을 수집한 자연주의적 연구, 그리고 반응이 기대와 환경, 곧 세트와 세팅(set and setting)의 함수라는 발견이 이어진다. 감각의 고양에서 타인과의 동질감, 드물게는 모든 형태가 사라진 "화이트 라이트(White Light)"까지, 체험의 위계가 보고된다. 다만 그 절정의 상태는 오래가지 않았다. 2~3일 뒤 그는 이미 체험을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었다.
As I looked down at my legs for reassurance, I could see nothing below the kneecaps, and slowly, now to my horror, I saw the progressive disappearance of limbs and then torso
안심하려고 다리를 내려다보았을 때, 무릎 아래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이제는 공포 속에서, 팔다리가, 이어서 몸통이 차례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but who’s minding the store?
그런데 가게는 누가 보고 있지?
사이키델릭 단계의 한계를 요약하는 짧고 결정적인 장이다. 한 번의 체험으로 영원히 깨어 있게 되리라는 기대는 일찍 무너졌다. 문제는 단순했다. 아무리 실험 설계가 정교해도,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반드시 내려온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시도도 있었다. 다섯 명이 건물에 틀어박혀 3주간 네 시간마다 LSD 400마이크로그램을 복용했다. 내성이 생겨 고원 상태에 머물다가, 건물을 나서고 며칠 만에 그들은 다시 내려왔다. 천국에 들어가 모든 것을 보고 나서 다시 쫓겨나기를 수백 번 반복한 끝에 남은 것은,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부드러운 우울이었다.
no matter how ingenious my experimental designs were, and how high I got, I came down.
내 실험 설계가 아무리 기발해도, 내가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나는 내려왔다.
as if you came into the kingdom of heaven and you saw how it all was and you felt these new states of awareness, and then you got cast out again
마치 천국에 들어가 모든 것이 어떠한지를 보고 새로운 의식 상태를 느꼈는데, 그러고 나서 다시 쫓겨나는 것 같았다.
내면의 기준점을 반복해서 확인하면서, 그는 환경의 승인에 점점 덜 의존하게 된다. 1963년 하버드에서 해임되던 날의 기자회견이 그 시금석이다. 기자들과 부모, 동료 모두가 그를 몰락한 패배자로 바라보는 가운데, 그의 내면은 "내가 하는 일은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모두가 동의하는데 혼자만 다르게 느낀다면 그것이 광기의 정의겠지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제정신이라고 느꼈다.
이 시기의 통찰 하나가 이후 공동체 실험들의 근거가 된다. 새로운 의식 상태는 그것을 지지해 줄 환경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을 본 사람도 "이봐 샘, 쓰레기 좀 비워"라는 말 한마디에 다시 "쓰레기를 비우는 샘"으로 돌아온다. 같은 시기 리어리와 랄프 메츠너(Ralph Metzner)는 «티베트 사자의 서»가 사이키델릭 체험의 정밀한 지도임을 발견하고 이를 «The Psychedelic Experience»로 다시 쓴다. 동양의 문헌이 처음으로 이 서사에 등장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1966~67년에 이르러 그는 막다른 길에 선다. 리어리도, 메츠너도,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도 인도에 다녀왔지만 여전히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직장도 확신도 소진된 1967년, 사이키델릭 여행의 안내자였던 부유한 청년이 랜드로버로 동방의 성자들을 찾아가는 여행을 제안한다. 그는 LSD 한 병을 챙겨 떠난다. 성자를 만나면 LSD를 건네고 이것이 무엇인지 묻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석 달의 관광 끝에 카트만두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짙은 절망이었다. LSD는 충분히 있었지만, 그것이 보여 줄 정원과 그 후의 추방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verybody was looking at me that way, and inside I felt, “What I’m doing is all right.”
모두가 나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내 안에서는 "내가 하는 일은 괜찮다"는 느낌이 있었다.
It takes a while to realize that God can empty garbage.
신도 쓰레기를 비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카트만두의 히피 식당 "블루 티베탄"에 키 6피트 7인치, 금발 머리에 금발 수염을 기르고 인도 성자의 옷을 입은 미국 청년이 걸어 들어온다. 앨퍼트는 즉시 알아본다. 하버드 교수로, 사이키델릭 대변인으로 살며 늘 서로의 눈에서 "당신은 아는가?"를 확인하던 그가, 마침내 바위처럼 단단한, 어디를 눌러도 그대로인 존재를 만난 것이다. 닷새의 대화 끝에 그는 일등석 일본행 대신, 캘리포니아 라구나비치 출신의 스물세 살 청년을 따라 맨발의 사원 순례를 떠난다.
바그완 다스(Bhagwan Dass)의 훈련은 단순하고 가차 없었다. 과거의 무용담을 꺼내면 "과거를 생각하지 마라, 그저 지금 여기에 있어라", 여행이 얼마나 걸릴지 물으면 "미래를 생각하지 마라, 그저 지금 여기에 있어라". 책 제목이 된 문장은 이 길 위의 대화에서 태어났다. 이야기꾼으로 살아온 그의 게임 전체, 곧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계획과 감정의 드라마가 통째로 무장해제되었고, 남은 것은 침묵과 성가와 하타 요가(hatha yoga) 자세뿐이었다.
여정이 길어질수록 이 청년의 이상한 깊이가 드러난다. 테라바다 불교 사원에서도, 시바파 수행자들 사이에서도, 티베트 카규파 라마들 사이에서도 그는 내부자로 환영받았다. 그리고 어느 밤, 별빛 아래에서 앨퍼트는 전해 1월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임재를 강렬하게 느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 경험이 다음 장의 복선이 된다.
Don’t think about the past. Just be here now.
과거를 생각하지 마라. 그저 지금 여기에 있어라.
Emotions are like waves. Watch them disappear in the distance on the vast calm ocean.
감정은 파도와 같다. 그것이 광대하고 고요한 바다 저 멀리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라.
원서에서는 "바그완 다스" 장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1부 전체의 정점이다. 비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바그완 다스는 "나의 구루(guru)를 만나러 산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고, 빌리기 싫었던 랜드로버를 몰아 히말라야 기슭의 작은 사원에 도착한다. 언덕 위 담요를 두른 노인은 다짜고짜 "그 큰 차를 나에게 주겠는가", "미국에서 돈을 많이 벌었는가"라고 묻고, 앨퍼트는 유대인 모금가 집안 출신인 자신도 본 적 없는 노골적인 "수금"이라며 편집증적인 경계심에 사로잡힌다.
그날 저녁 마하라지(Maharaj-ji), 곧 님 카롤리 바바는 그를 불러 앉히고 조용히 말한다. 어젯밤 별 아래 있었다는 것, 어머니를 생각했다는 것, 어머니가 지난해 죽었다는 것, 죽기 전 배가 커졌다는 것. 그리고 눈을 감고 말한다. "비장(spleen)."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사실들이었다. 설명을 찾아 전속력으로 회전하던 그의 마음은, 풀 수 없는 문제를 받은 컴퓨터처럼 회로가 타 버리고 멈춘다. 그 순간 가슴을 찢는 통증과 함께 통곡이 터진다. 슬픔도 기쁨도 아닌 울음이었고, 그가 찾을 수 있었던 유일한 말은 "집에 온 것 같았다"였다.
다음 날 아침 마하라지는 "약을 가져오라"고 하더니, 여행용으로 특별히 만든 순도 높은 LSD "화이트 라이트닝" 세 알, 도합 915마이크로그램을 손바닥에 받아 삼킨다. 누구에게든 압도적인 용량이다. 그러나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성자에게 LSD가 무엇인지 묻겠다던 여행의 질문에 대한, 말 없는 대답이었다. 람 다스는 판단을 독자에게 넘긴다. "이제 당신도 내가 가진 데이터를 가졌다."
He leaned back and closed his eyes and said, “Spleen. She died of spleen.”
그는 몸을 뒤로 기대고 눈을 감더니 말했다. "비장. 그녀는 비장 때문에 죽었다."
The only thing I could say was it felt like I was home. Like the journey was over. Like I had finished.
내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집에 온 것 같았다는 것이다. 여정이 끝난 것 같았다. 내가 다 마친 것 같았다.
사원에서의 수련기다. 머물겠느냐는 질문도, 계약도, 서약도 없었다. 옷과 방이 주어졌고 아무도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마하라지는 겉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담요 한 장이 전 재산인 그는 사하지 사마디(sahaj samadhi)라 불리는 상태에 있다고 소개된다. 그러나 제자의 마음속은 훤히 들여다보인다. 라마 고빈다를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한 다음 날 "즉시 라마 고빈다에게 가라"는 전갈이 오고, 델리의 식당 구석에서 몰래 먹은 비스킷은 "비스킷은 맛있었느냐?"라는 인사로 돌아온다.
이 투명함의 체험이 가져온 결론은 감시의 공포가 아니라 해방이었다. 부끄러운 생각까지 전부 알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온전한 사랑으로 바라보는 존재 앞에서, 숨길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자유가 된다. 정신분석 5년으로도 지키고 있던 마음의 사적인 방들이 이렇게 열린다.
일상의 스승은 따로 있었다. 침묵 수행자 하리 다스 바바(Hari Dass Baba)는 매일 정오 무렵 나타나 칠판에 한 문장을 쓰고 떠났다. "소매치기가 성자를 만나면 주머니만 본다" 같은 짧은 경구들은 동기가 지각을 결정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아힘사(ahimsa, 불상해)와 진동에 대한 가르침도 "뱀은 마음을 안다"는 한 줄로 압축되었다. 몇 달 뒤 비베카난다의 «라자 요가»를 읽고서야 그는 자신이 파탄잘리(Patanjali)의 여덟 가지 요가, 곧 아쉬탕가 요가(Ashtanga Yoga)를 체계적으로 배워 왔음을 깨닫는다.
If a pickpocket meets a saint, he sees only his pockets.
소매치기가 성자를 만나면, 그의 눈에는 주머니만 보인다.
Once you realize God knows everything, you’re free.
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당신은 자유다.
1부의 마지막 대목이다. 미국으로 돌아갈 때 그는 마하라지의 이름도, 있는 곳도 말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는다. 단서를 조합해 찾아간 이들은 즉시 돌려보내졌다. 람 다스는 이 기묘한 폐쇄성에서 하나의 메시지를 읽어 낸다. 당신이 찾는 것은 다른 어디로 갈 필요가 없는 곳, 곧 당신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귀환의 논리는 카르마(karma)다. 그는 자신을 "길 위의 초심자"라 부르며, 풀어야 할 카르마, 곧 미완의 책무 때문에 당분간 서구로 돌아왔다고 말한다. 배운 것을 나누는 일이 그 책무의 일부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요가를 가르치는 것, 노래하는 것, 사랑하는 것, 각자가 자기만의 수레(vehicle)를 찾으면 된다. 리처드 앨퍼트의 몰락기로 시작한 1부는, 이렇게 바바 람 다스의 소명 선언으로 닫히며 2부의 형이상학과 3부의 수행 매뉴얼로 건너가는 다리를 놓는다.
I have returned to the West for a time to work out karma or unfulfilled commitment.
나는 카르마, 곧 다하지 못한 책무를 풀기 위해 당분간 서구로 돌아왔다.
For me, this story is but a vehicle for sharing with you the true message . . . the living faith in what is possible.
나에게 이 이야기는 진짜 메시지, 곧 가능한 것에 대한 살아 있는 믿음을 당신과 나누기 위한 수레일 뿐이다.
리처드 앨퍼트가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다. 아버지 조지 앨퍼트는 철도 회사 사장을 지낸 변호사로, 브랜다이스 대학 설립에도 관여했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하버드 대학에 부임한다. 이후 사회관계학과, 심리학과, 교육대학원, 보건서비스의 네 부서에 적을 두는 촉망받는 젊은 교수가 된다.
티모시 리어리가 멕시코 쿠에르나바카에서 실로시빈 버섯을 먹고 "심리학자로서의 전 생애보다 많이 배웠다"고 선언한다. 하버드로 돌아온 그는 실로시빈 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3월 초(원문 기준 3월 6일), 눈보라 치던 밤 리어리의 집에서 앨퍼트가 처음 실로시빈을 복용한다. 정체성과 몸이 사라진 뒤에도 깨어 있는 "나"를 발견한 이 밤이 여정의 기점이 된다.
사이키델릭 연구를 둘러싼 논란 끝에 앨퍼트가 하버드에서 해임되고, 리어리도 대학을 떠난다. 두 사람의 해임은 전국적 뉴스가 되었고, 사이키델릭 논쟁의 상징적 사건으로 남는다.
리어리, 메츠너, 앨퍼트가 «티베트 사자의 서»를 심리적 죽음과 재생의 안내서로 재해석한 책을 펴낸다. 사이키델릭 운동과 동양 고전이 처음 본격적으로 결합한 사례다.
1월 20일(원문 기준), 어머니가 비장 질환으로 세상을 떠난다. 임종 전 병상에서 모자는 역할을 넘어선 깊은 교감을 나누었고, 이 죽음은 이듬해 마하라지와의 만남에서 결정적 매듭이 된다.
테헤란에서 랜드로버로 출발해 인도에 닿는다. 카트만두에서 바그완 다스를 만나 순례를 따라나서고, 히말라야 기슭에서 님 카롤리 바바(마하라지)를 만나 삶의 방향이 바뀐다.
마하라지에게 받은 이름 "람 다스"(신의 종)로 미국에 돌아온다. 사원에서 배운 아쉬탕가 요가와 "지금 여기"의 메시지를 들고 강연을 시작하며 새로운 청중을 만난다.
뉴멕시코의 라마 재단(Lama Foundation)과 함께 «Be Here Now»의 전신인 «From Bindu to Ojas»를 수공예 형태로 제작해 배포한다.
자전적 여정, 그림 명상서, 수행 요리책, 추천 도서 목록을 한 권에 담은 «Be Here Now»가 출간된다. 이후 수십 년간 널리 읽히며 서구 영성 문화의 이정표가 된다.
2부 「빈두에서 오자스로(From Bindu to Ojas)」는 이 책의 심장부다. 갈색 재생지 위에 손글씨와 그림이 한 몸으로 얽힌 108쪽 — 힌두교 염주 말라(mala)의 구슬 수와 같은 숫자 — 의 이른바 "코어 북(core book)"이다. 활자 대신 손으로 눌러 쓴 글씨는 페이지마다 커지고 작아지고 기울고 소용돌이치며 그림 속으로 흘러든다. 뉴멕시코의 공동체 라마 재단(Lama Foundation) 사람들이 손으로 그려 완성한 이 부분은, 책이라기보다 넘겨 가며 통과하는 하나의 시각적 만다라(mandala)에 가깝다. 형식 자체가 첫 번째 가르침이다. 정보를 훑듯이 소비할 수 없게 만들어졌기에, 읽는 이는 한 쪽 한 쪽 앞에 멈추어 서야 하고, 그 멈춤이 곧 이 부가 말하려는 "지금 여기"의 연습이 된다.
제목은 탄트라(tantra) 전통의 용어에서 왔다. 빈두(bindu)는 "점" 혹은 "물방울"로, 성적·생명적 에너지가 응축된 정수를 가리키고, 오자스(ojas)는 그 에너지가 위로 끌어올려져 변환된 영적 활력을 뜻한다. 그러므로 "빈두에서 오자스로"란 낮은 곳의 에너지를 높은 곳의 에너지로 바꾸는 일, 곧 요가 전체의 과정을 한 구절로 요약한 말이다. 내용은 람 다스가 1969~70년 무렵 미국 각지에서 행한 강연 녹취를 압축하고 재배열한 것으로, 심리학 교수였던 리처드 앨퍼트의 언어와 인도에서 돌아온 순례자의 언어가 한 문장 안에서 계속 교차한다.
이 부의 문장은 논증이 아니라 목소리다. 마침표보다 행갈이가 많고, 같은 구절이 만트라(mantra)처럼 되풀이되며, 농담과 경전 인용이 한 호흡에 붙어 있다. 눈으로 빨리 읽으면 흩어지고, 소리 내어 천천히 읽으면 리듬이 살아나도록 설계된 의식의 흐름이다. 실제로 초기 독자들은 이 부를 혼자 또는 여럿이 낭독하는 방식으로 읽었고, 그것이 저자와 제작자들이 의도한 사용법이었다.
Consciousness equals Energy = Love = Awareness = Light = Wisdom = Beauty = Truth = Purity. It's all the Same trip. Any trip you want to take leads to the Same place.
의식은 곧 에너지 = 사랑 = 알아차림 = 빛 = 지혜 = 아름다움 = 진리 = 순수함이다. 전부 같은 여행이다. 네가 택하는 어떤 여행도 같은 곳으로 이어진다.
코어 북은 독자를 청중이 아니라 지원자로 대한다. 이 책이 말하는 여정은 관광이 아니라 변형이어서, 출발한 "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다. 도착하는 것은 에고가 타 버리고 남은 어떤 정수뿐이라는 것이다. 람 다스는 이 역설을 방사선 벨트를 통과하는 우주 비행, 불속으로 날아드는 나방, 고치 속의 애벌레 같은 비유로 변주한다.
특히 애벌레의 비유가 핵심적이다. 애벌레는 "나비가 되겠다"고 결심해서 나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애벌레로 사는 일이 끝났을 때 저절로 나비가 되기 시작한다. 부름 역시 마찬가지여서, 손을 들고 자원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누구도 등을 떠밀지 않았다는 것 — 이 여정은 선택이라기보다 무르익음이라는 것이 이 부의 첫 번째 전언이다.
Do you realize when you go on that journey In order to get to the destination You Can never get to the destination? In the process You Must die … pretty fierce journey … we want volunteers
그 여정에서 목적지에 닿으려면 "너"는 결코 목적지에 닿을 수 없다는 걸 아는가? 그 과정에서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 꽤 사나운 여정이다 … 우리는 지원자를 원한다
there's something that pulls a person toward this journey way away back deep inside is a memory
사람을 이 여정으로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다. 저 깊은 안쪽에 하나의 기억이 있다.
책 제목이 된 사상이다. 코어 북에서 "지금 여기"는 시간 관리의 요령이 아니라 존재론적 사실로 제시된다. 새벽 3시 47분에 알람을 맞추고 일어나 "지금 몇 시인가"라고 물으면 답은 언제나 "지금"이고, "여기가 어디인가"라고 물으면 답은 언제나 "여기"다. 돌아가는 것은 시계일 뿐, 존재는 항상 영원한 현재에 앉아 있다는 것이다.
람 다스는 이것을 일상의 장면으로 끌어내린다. 전화가 울리면 그 벨소리가 지금 여기이므로 받으면 되고, 3주 뒤의 약속은 수첩에 적는 그 행위가 지금 여기다. 아이가 계단을 내려오는 아침 식탁은 "붓다가 붓다를 만나는" 최초의 순간이 된다. 미래를 계획하는 일 자체가 아니라, 계획 속으로 도망쳐 현재를 비우는 마음의 습관이 문제라는 것이 이 사상의 정확한 과녁이다.
Now is Now. Are you going to be here Or not? It's as simple as that!
지금은 지금이다. 너는 여기에 있을 것인가, 아닌가? 그만큼 단순한 일이다!
You're right here again. What blows your mind is you were here all the time & it's such a cosmic joke
너는 다시 바로 여기에 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건, 네가 줄곧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주적 농담이다.
"나는 이 몸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코어 북이 우파니샤드와 «바가바타(Bhagavatam)»에서 직접 빌려 온 축이다. 태어나고 병들고 죽는 것은 몸과 인격, 곧 에고이고, 그 뒤에서 이 모든 드라마를 지켜보는 목격자가 아트만(atman), 참나다. 죽음의 공포는 존재의 사실이 아니라 에고의 부서지기 쉬움에서 나오는 부산물로 설명된다.
흥미로운 것은 람 다스가 이 고대의 명제를 심리학자의 언어로 다시 쓴다는 점이다. 에고는 악이 아니라 "우주에 대한 인지적 틀", 즉 세계를 정리하는 습관의 다발이다. 문제는 그 틀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데 있다. 생각을 통해서는 시간과 공간 밖으로 나갈 수 없으므로, 생각의 바깥에 서서 자기 생각을 바라보는 자리 — 그것이 이 부가 가리키는 참나의 자리다.
I am without form, without limit, Beyond Space, Beyond Time. I am in everything, everything is me. I am the Bliss of the Universe.
나는 형상이 없고 한계가 없다. 공간 너머, 시간 너머에 있다. 나는 모든 것 안에 있고, 모든 것이 나다. 나는 우주의 지복이다.
The atman or divine self is separate from the body … pure, self-luminous without attributes free all-pervading it is the eternal witness
아트만, 곧 신성한 자아는 몸과 별개다 … 순수하고 스스로 빛나며 속성이 없고 자유로우며 모든 곳에 편재하는, 영원한 목격자다.
코어 북에서 구루(guru)를 다루는 대목은 뜻밖에도 고백으로 시작한다. 람 다스는 인도 여정을 이야기할 때면 늘 스승의 기적을 말하게 되지만, 정작 자신에게 기적은 본질이 아니었다고 털어놓는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적뿐이고, 정작 중요한 것은 말로 옮겨지지 않는다는 것 — 그는 이를 가로등 밑에서 열쇠를 찾는 나스루딘 우화에 빗댄다. 집 안에서 잃어버렸지만 밖이 밝으니 밖에서 찾는다는 이야기다.
그가 도달하는 결론은 구루 숭배의 정반대편에 있다. 구루는 착륙할 활주로가 비기를 기다리며 상공을 선회하는 비행기 같아서, 마음이 고요해지는 만큼 가까워진다. 마하라지(Maharaj-ji)는 지금 이 순간 떠올리는 생각 하나보다 멀리 있지 않으며, 끝내 "네가 곧 구루다"라는 말에 이른다. 바깥의 스승은 안에 이미 있는 것을 비추는 완전한 거울일 뿐이라는 것이다.
when I tell the story of my journey in India and tell of the guru, I always speak of his miracles, although, from my point of view they are not the essence of the matter at all
인도 여정과 구루 이야기를 할 때면 나는 늘 그의 기적을 말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기적은 이 일의 본질이 전혀 아니다.
the people who have been sharing this journey with me … have because of their purity made direct contact with the guru in themselves through the purity of their love
이 여정을 나와 함께해 온 사람들은 … 그 순수함 덕분에, 사랑의 순수함을 통해 자기 안의 구루와 직접 만났다.
침묵 수행 중이던 스승 하리 다스 바바(Hari Dass Baba)가 석판에 처음 써 준 문장은 "욕망은 덫이다"였다. 코어 북은 이를 붓다의 사성제와 포개어 놓는다.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이며, 잡으려 하지 않으면 잃음으로 괴로울 일도 없다는 것이다.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콘의 비유가 이 대목의 백미다. 다 먹기도 전에 녹고, 다 먹으면 물이 필요하고, 물을 마시면 다음 콘이 필요한 순환 — 람 다스는 그것을 "인생이라 부른다"고 눙친다.
그러나 처방은 세상을 떠나는 금욕이 아니다. 카르마 요가(karma yoga), 곧 "장작을 패고 물을 긷는" 일상의 행위를 그대로 하되 그 열매에 대한 집착만을 내려놓는 길이다. 산속 동굴이 아니라 부엌과 직장에서 이루어지는 포기 — 총체적 포기(Total Renunciation)라는 강한 말이 가리키는 것은 행위의 중단이 아니라 소유욕의 중단이다.
Desire is a trap. Desire-lessness is moksha (Liberation)
욕망은 덫이다. 욕망 없음이 목샤(해탈)다.
Do it without attachment. Another way of saying it is: Total Renunciation!
집착 없이 하라. 달리 말하면, 총체적 포기다!
코어 북은 현상 세계 전체를 마야(maya), 곧 환영이라 부르는 베단타의 오래된 교설을 "드라마"라는 무대 언어로 번역한다. 욕망도, 생각도, 호흡도, 감정도, 형상을 가진 모든 것이 드라마다. 심지어 이 책 자체도 드라마라고 스스로 밝힌다. 환영이라는 말은 세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세계를 실체로 움켜쥐는 우리의 지각 방식이 연극이라는 뜻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관람의 자세다. 코어 북의 화자는 심장의 동굴에 앉아 자기 삶이라는 드라마 전체를 지켜본다고 말한다. 그때의 시선은 냉소가 아니라 "견딜 수 없는 연민(Unbearable Compassion)"이다. 무대 위의 배역들이 저마다 진심으로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기에, 환영임을 보는 눈과 아파하는 가슴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겹눈의 시선이 마야론을 허무주의와 갈라놓는다.
Drama is drama is drama is drama. desire is drama. thought is drama. breathing is drama. emotions are drama. all form is drama
드라마는 드라마이고 드라마이고 드라마다. 욕망도 드라마, 생각도 드라마, 호흡도 드라마, 감정도 드라마, 모든 형상이 드라마다.
we watch the entire drama That Is Our Lives we watch the illusion with Unbearable Compassion
우리는 우리의 삶이라는 드라마 전체를 지켜본다. 우리는 그 환영을 견딜 수 없는 연민으로 바라본다.
드라마의 다른 얼굴이 릴라(lila)다. 힌두 사상에서 릴라는 신이 우주를 빚고 굴리는 일을 노동이 아니라 놀이로 보는 관점이다. 코어 북은 아무도 어디론가 가고 있지 않으며, 우리 모두 영원한 시공 안에서 몸을 바꿔 가며 "춤에 이어 춤을" 추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윤회조차 형벌이 아니라 안무가 되는 것이다.
이 관점은 일상의 태도로 곧장 이어진다. 같은 설거지, 같은 보험료 납부도 무거운 짐으로 질 수도 있고 춤의 일부로 출 수도 있다. 람 다스는 이를 "서핑"이라 부른다 — 파도를 없앨 수는 없지만 파도를 탈 수는 있다는 것이다. 시바(Shiva)의 춤과 캘리포니아의 서핑 보드가 한 문단에서 만나는 이 대목은, 인도 형이상학이 미국 대중문화의 감각으로 번역되는 순간을 잘 보여 준다.
nobody is going anywhere nobody is coming from anywhere we're all here … we're just doing lila rasa the divine dance we're dancing & dancing & dancing dance after dance in one body in another body
아무도 어디로 가지 않고 아무도 어디에서 오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여기에 있다 … 우리는 그저 릴라 라사, 신성한 춤을 추고 있다. 이 몸으로, 또 다른 몸으로, 춤에 이어 춤을 추면서.
코어 북에서 죽음은 두 겹으로 다루어진다. 하나는 몸의 죽음으로, 참나의 관점에서는 소멸이 아니라 옷을 갈아입는 변형에 불과하다. 다른 하나는 살아 있는 동안 치러야 하는 에고의 죽음으로, 이쪽이 훨씬 절박한 주제다. "다시 태어나야 천국에 든다"는 복음서의 언어가 여기서는 심리적 사건 — 자아 구조의 해체와 재구성 — 을 가리키는 정확한 기술로 읽힌다.
흥미로운 것은 경고의 대목이다. 에고를 쓴 채로 문을 통과하면 "천국의 사무 존스"가 되어 과대망상에 빠진다고, 람 다스는 정신병원의 메시아 콤플렉스를 예로 들어 말한다. 죽지 않고 태어나려는 시도야말로 위험하다는 것이다. 죽음을 먼저 통과한 자에게만 재생이 안전하다는 이 순서가, 코어 북이 반복하는 "먼저 죽어라"의 실천적 의미다.
there is no fear of death because there is no death it's just a transformation an illusion and yet, seeing all that, you still chop wood and carry water.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변형일 뿐, 환영일 뿐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보고서도, 너는 여전히 장작을 패고 물을 긷는다.
you gotta die To be born … Only When You have been born Again Do you enter the Kingdom of heaven
태어나려면 죽어야 한다 … 다시 태어났을 때에만 너는 천국에 들어간다.
코어 북의 우주론에서 세계의 마지막 층위는 음양(陰陽)의 세계, 곧 가장 높은 이원성의 평면이다. 신과 인간, 선과 악, 쾌락과 고통 — 대부분의 사람이 평생을 사는 곳이 여기다. 거기서 나가는 유일한 길은 모든 대립쌍의 양극을 붙들어 그 둘이 하나임을 보는 것이라고 책은 말한다. 세대 갈등도, 히피와 경찰의 대립도,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 내는 한 벌의 거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됨은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 있다. "존재의 큰 바다를 건너는 여행"이라는 구도의 오랜 은유를, 코어 북은 안으로 파고드는 여행으로 뒤집는다. 더 깊이 들어갈수록 더 많은 진실을 만나고, 끝에서 만나는 것은 남과 나의 구별이 사라진 하나의 존재다. 박티(bhakti), 곧 사랑의 길이 같은 자리에 이르는 지름길로 제시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the journey across the great ocean of existence Is a journey inward ever in deeper and deeper and the deeper you get in the more you meet truth
존재의 큰 바다를 건너는 여행은 안으로 향하는 여행이다. 점점 더 깊이, 더 깊이. 그리고 깊이 들어갈수록 더 많은 진실을 만난다.
You Just Love UNTIL You and the Beloved become One
그저 사랑하라. 너와 사랑받는 이가 하나가 될 때까지.
코어 북은 고통을 미화하지도, 회피하지도 않는다. 고통은 타파스야(tapasya), 곧 "불로 바로잡음"이다. 우스펜스키를 인용하며, 욕망과 싸울 때 생기는 내면의 마찰이 불을 일으키고 그 불이 내면 세계를 하나로 벼려 낸다고 말한다. 자기연민에 젖는 일 — "이 얼마나 향기로운 신품종 자기연민인가"라고 스스로를 놀리는 대목 — 과 고통을 통과하는 일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역설이 등장한다. 이 여정은 전면적인 고통을 요구하지만, 그것은 "고통이 아닌 고통"이어야 한다. 고통을 다 겪되, 고통받는 "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가 못 박는 병사를 절대적 연민으로 바라보았으리라는 상상은 이 역설의 극한 예시다. 아픔은 일어나되, 아픔의 소유자가 사라진 자리 — 코어 북이 말하는 고통의 연금술이다.
This trip requires total suffering but: It's got to be suffering that is no suffering. You've got to go the whole suffering trip but: You can't be the guy who is suffering
이 여정은 전면적인 고통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 아닌 고통이어야 한다. 고통의 길을 끝까지 가야 하지만, 고통받는 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코어 북의 화자는 이상한 고백으로 말문을 연다. "쓰고 있지만 '내'가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글을 쓰는 동안에도 심장의 동굴에서는 만트라가 돌아가고 있고, 자신은 그 곁에서 경외와 경이로 지켜볼 뿐이라는 것이다. 말의 표면 아래에 침묵의 층이 깔려 있다는 이 감각이, 이 부의 독특한 문체 — 외치다가 속삭이고, 설교하다가 침묵으로 빠지는 — 를 만든다.
이는 언어에 대한 하나의 이론이기도 하다. 생각하는 마음은 "완벽한 하인이자 형편없는 주인"이며, 말은 진실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진실 쪽으로 몸을 돌리게 하는 손가락이다. 그래서 코어 북의 문장들은 정보 전달이 아니라 낭송을 위해 배열되어 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를 탐부라의 울림, 곧 소리 그 자체로 읽는 대목은 이 언어관의 요약이다.
I am writing but "I" am not writing. Inside of me in the heart cave is a mantra going on that reminds me who I really am
나는 쓰고 있지만 "나"는 쓰고 있지 않다. 내 안 심장의 동굴에서는 만트라가 돌아가며, 내가 정말 누구인지 일깨워 주고 있다.
Behind every word & behind it all Is a mantra Going inside my head In which I am sitting Calmly watching this whole drama unfold
모든 말 뒤에, 이 모든 것 뒤에 만트라가 있다. 내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그 만트라 안에 나는 앉아, 이 드라마 전체가 펼쳐지는 것을 고요히 지켜본다.
동양의 비밀은 사실 비밀이 아니라고 코어 북은 말한다. 경전과 성직자들은 오히려 소리치고 있는데, 듣는 이의 "머리가 있는 자리" 때문에 그것이 비밀로 남는다는 것이다. 수신기가 그 주파수에 맞춰져 있지 않으면 아무리 크게 방송해도 들리지 않는다. 람 다스 자신도 책들을 읽으면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합리적 인간으로서 찾는 동안에는 자기 그림자만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이 부는 구르지예프(Gurdjieff)의 감옥 비유를 빌려 온다. 탈옥의 첫 조건은 자신이 감옥에 있음을 아는 것이며, 자유롭다고 믿는 죄수는 탈출할 수 없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다음 메시지"는 언제나 있고, 준비되는 순간 들리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배움을 자격이 아니라 무르익음의 문제로 보는 이 관점이, 코어 북이 독자를 다그치지 않고 기다리는 이유다.
You don't seem to understand: You Are In Prison. If you are to get out of prison the first thing you must realize is: You Are In Prison. If you think you're free you can't escape.
너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너는 감옥에 있다. 감옥에서 나가려면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네가 감옥에 있다는 사실이다. 자유롭다고 생각하면 탈출할 수 없다.
Whenever you're ready you'll hear the next message. The interesting thing is there's always a next message and it's always available to you.
준비되는 순간 너는 다음 메시지를 듣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다음 메시지는 언제나 있고 언제나 너에게 열려 있다는 사실이다.
«Be Here Now»의 3부는 "성스러운 삶을 위한 요리책(Cookbook for a Sacred Life)"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1부가 람 다스 개인의 전기이고 2부가 의식의 지도를 그린 시각적 경전이라면, 3부는 그 지도를 들고 실제로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을 위한 실용 매뉴얼이다. 요리책이라는 은유는 정확하다. 요리책은 교리를 강요하지 않는다. 수많은 조리법을 펼쳐 놓고 독자가 자신의 입맛과 형편에 맞는 것을 고르게 할 뿐이다. 책 역시 "모든 사람의 필요는 다르고 모두가 길 위의 서로 다른 지점에 서 있다"고 전제하며,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지금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고르라고 권한다. 헌사가 말하듯 이 부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싶은 이들(those who wish to get on with it)"에게 바쳐져 있다.
이 매뉴얼은 람 다스 혼자 쓴 것이 아니라 뉴멕시코의 라마 재단(Lama Foundation) 공동체가 함께 정리한 방법론이다. 잠자기, 먹기, 공부, 호흡, 만트라 같은 항목들은 특별한 종교적 재능이 아니라 일상 그 자체를 다룬다. 여기에 이 부의 핵심 사상이 있다. 처음에는 일요일 예배나 아침 명상처럼 정해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다나(sadhana, 영적 수행)를 "하지만", 결국에는 "사다나는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의식적 존재가 되는 일은 삶에서 분리된 취미가 아니라 삶 전체의 재조리라는 선언이 3부 전체를 관통한다.
WARNING: if you don't have room in your livingroom for an elephant— don't make friends with the elephant trainer . . .
경고: 거실에 코끼리를 들일 자리가 없다면, 코끼리 조련사와 친구가 되지 말라…… — 수피 신비가
서문은 겸손의 언어로 시작한다. 저자들은 자신들을 완성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곤경을 연민으로 자각하는" 동료 여행자로 소개한다. 나누는 것도 수행의 일부이고, 듣는 것도 수행의 일부이며, 우리는 모두 길 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하다. "지금 당신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한다.
이 장은 3부 전체의 사용법이기도 하다. 수록된 기법들은 처방전이 아니라 조리법이고, 무엇을 고를지는 독자의 내면의 목소리가 결정한다. 매일 조금씩, 환영의 구름이 얇아지다가 마침내 빛이 드러난다는 점진적 진화의 감각이 서문의 낙관을 이룬다.
The journey of a thousand miles begins with one step.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 — 노자
이 장은 해설 없이 "강력한 인용들(Potent Quotes)"만으로 짜여 있다. 전도서, 예수,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 우스펜스키(Ouspensky), 구르지예프(Gurdjieff), 머튼(Merton)의 목소리가 하나의 주제를 변주한다. 영적 작업은 강요될 수 없고, 때가 무르익어야 시작된다는 것이다. 스승도 제자를 대신해 단 한 걸음도 걸어 줄 수 없으며, 사람은 자신이 익지 않은 것을 알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준비됨의 역설적 조건이다. 구르지예프에 따르면 이 길에 진지하게 들어서는 사람은 먼저 "실망한" 사람이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힘에, 그리고 자신이 기대 왔던 낡은 방식들에 실망해야 새것을 들을 귀가 열린다. 준비됨이란 성취가 아니라 일종의 무르익은 비어 있음이다.
Dislodging a green nut from a shell is almost impossible, but let it dry and the lightest tap will do it.
덜 익은 열매를 껍질에서 빼내기란 거의 불가능하지만, 마르도록 두면 가장 가벼운 두드림으로도 떨어진다. — 라마크리슈나
이 장은 문답 형식으로 진행된다. 구루를 어떻게 찾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서구적 상식을 뒤집는다. 구루는 찾아서 얻는 대상이 아니다. 준비가 되지 않은 채 구루를 찾아 나서면 찾지 못하고, 준비가 되면 구루는 정확히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다. 할 수 있는 일은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것뿐이며, 구루와 첼라(chela, 제자)의 관계는 물리적 차원의 것이 아니어서 이번 생에 스승을 육신으로 만나지 못해도 무방하다고 말한다.
교사(teacher)와 구루의 구분도 명료하다. "교사는 길을 가리키고, 구루는 길 그 자체다." 깨어남의 여정에서 수천 명의 교사를 만나게 되지만, 구루는 그 너머에서 기다린다. 그리고 다음 단계에 필요한 메시지는 교사, 연인, 적, 돌멩이, 책, 깊은 절망의 형태로 이미 도착해 있다는 "보물찾기"의 감각이 이 장의 핵심 위로다.
There is a place in each human being where at all times he knows exactly 'where it is at.' So, if in doubt about the next step, just listen. And if still in doubt, wait.
모든 인간 안에는 언제나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아는 자리가 있다. 그러니 다음 걸음이 의심스럽거든 그저 들으라. 그래도 의심스럽거든 기다리라.
버림이라 하면 새해 결심이나 가족을 떠나 동굴로 들어가는 극적인 행위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이 장은 버림을 외적 행위가 아니라 내적 태도로 재정의한다. 욕망 자체는 계속된다. 그것은 자연의 춤의 일부다. 달라지는 것은 "내가 곧 나의 욕망"이라는 동일시의 고리가 끊어진다는 점이다. 욕망을 억지로 없앨 수는 없으며, 지혜가 자라고 사다나에 몰입할수록 욕망이 스스로 떨어져 나간다. 이 과정이 바이라그(vairag, 세속적 욕망의 탈락)다.
비유가 아름답다. 욕망에 끌려다니는 동안 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불꽃이지만, 중심으로 돌아오면 바람이 닿지 않는 벽감 속 촛불처럼 고요해진다. 하리 다스 바바(Hari Dass Baba)의 말처럼 뱀의 껍질을 억지로 벗길 수는 없다. 때가 되면 스스로 벗는다.
But renunciation is much more subtle than that—and much harder—and much much more continuing. On the spiritual journey, renunciation means non-attachment.
그러나 버림은 그보다 훨씬 미묘하고, 훨씬 어려우며, 훨씬 더 지속적인 것이다. 영적 여정에서 버림이란 집착하지 않음을 뜻한다.
타파스야(tapasya)는 "불로 곧게 펴기"로 번역되는 고행 수행이다. 먹는 일에 사로잡혀 있다면 단식하고, 성에 집착한다면 성을 끊는 식으로, 욕망 충족을 의도적으로 중단해 내면에 마찰과 불을 일으키는 기법이다. 우스펜스키의 표현대로 욕망과의 투쟁이 만드는 불이 내면 세계를 하나의 전체로 벼려 낸다.
그러나 이 장의 절반은 경고에 바쳐진다. 고행은 얼마나 고생하는지에 대한 자부심이나 마조히즘으로 변질되어 에고를 오히려 강화할 수 있고, 자기 발달 수준을 넘는 과도한 고행은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해 수행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넘어지면 죄책감에 뒹굴지 말고 그냥 일어나라는 것, 천 번 실패해도 천한 번째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 고행의 실제 모습이라는 조언이 현실적이다.
That is, if one is preoccupied with eating and oral gratifications, just fast. If one is obsessed with sexual concerns, just give up sex. And so on. This technique is known as tapasya or “straightening by fire.”
즉 먹는 것과 구강의 만족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냥 단식하라. 성적 관심에 집착하고 있다면 그냥 성을 끊으라. 그런 식이다. 이 기법이 타파스야, 곧 '불로 곧게 펴기'라 불리는 것이다.
잠의 장은 수면을 의식 수행의 연장으로 다룬다. 길이 깊어질수록 필요한 잠은 줄어들지만, 출발점은 언제나 "지금 필요한 만큼 자는 것"이다. 저녁을 자극으로 채우는 서구적 생활에서 벗어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가능하다면 전기 없는 곳에서 일출과 일몰의 자연 질서에 리듬을 맞추라고 권한다.
이 장의 독특한 대목은 꿈에 대한 이론이다. 깊은 잠은 "하나(One)"와 다시 합일하여 프라나(pran, 생명 에너지)을 충전하는 상태이고, 우리가 꿈이라 부르는 것은 물리적 차원이 아닌 다른 차원들에서 겪는 경험이다. 만트라로 중심을 잡으면 배우로 출연하면서도 영화를 보듯 자신의 꿈을 지켜볼 수 있게 되며, 이는 깨어 있는 상태 역시 여러 의식 차원 중 하나일 뿐임을 깨닫게 하는 훈련이 된다.
As you get further on the path you will need less and less sleep. Start from where you are. Get as much sleep as you seem to need.
길을 따라 멀리 갈수록 잠은 점점 덜 필요해질 것이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시작하라. 필요해 보이는 만큼 충분히 자라.
몸은 "우리가 살며 깨달음의 작업을 수행하는 사원"이며, 먹는 일은 그 사원의 내부 환경을 조율하는 일이다. 다만 책은 급진적 식단 변경이 몸을 상하게 한다는 점을 먼저 경고한다. 보편적으로 옳은 단 하나의 식단은 없으며, 수행자는 여정의 단계마다 다른 음식이 필요하다. 육식을 줄일 때는 통곡물과 채소, 생선, 꿀, 견과로 옮겨 가고, 정화가 깊어지면 식단은 더 가벼워진다. 과식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며, 전통적 기준은 식사 후 위의 절반은 음식, 4분의 1은 물, 4분의 1은 공기로 남겨 두는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음식의 "진동"에 대한 관심이다. 살생을 수반하는 음식은 피하고, 불로 조리하는 음식에는 요리하는 사람의 진동이 스며들므로 만트라와 사랑으로 요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음식을 봉헌하면 그것은 프라사드(prasad, 축성된 음식)가 된다. 서구의 식전 기도도 같은 봉헌이니, "이제 기도를 계속하되, 이번에는 그 기도를 들으라"는 재치 있는 조언이 따라붙는다.
There is a state of mind suitable for taking of food—calmness. There is a Sufi saying: “If a person eats with anger, the food turns to poison.”
음식을 먹기에 알맞은 마음 상태가 있다. 고요함이다. 수피의 격언이 있다. '화를 품고 먹으면 음식이 독으로 변한다.'
공부는 만트라처럼 "더 높은 의식의 관념들에 가까이 다가가는 기법"이다. 지식 수집을 숭배하는 문화의 구성원답게 구도자는 대개 독서로 길을 시작하는데, 책은 영적 문헌의 저자를 네 부류로 나눈다. 깨달은 존재, 길 위에서 진지하게 나아가는 구도자, 정교한 지적 모델을 세우는 학자, 그리고 외부에서 "사실"만 좇는 직업적 저술가다. 첫 개관이 끝나면 독서는 자연히 앞의 두 부류로 좁혀진다. 아는 자들, 그리고 자신을 놓고 진지하게 작업하는 자들과 "어울리는" 것이 공부의 본령이기 때문이다.
공부의 둘째 단계는 숙고(reflection)다. 요가난다(Yogananda)의 «어느 요기의 자서전»에 나오는 벵골의 스승 다브루 발라브의 일화가 그 모범으로 제시된다. 제자들은 기타의 한 구절을 반 시간 동안 응시하고, 눈을 감고 또 반 시간을 보내고, 다시 한 시간을 명상한다.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생명력을 준 영적 원천을 찾는 독서다.
No, not fully. Seek the spiritual vitality that has given these words the power to rejuvenate India century after century.
아니, 아직 충분치 않다. 이 말씀들이 세기를 거듭하며 인도를 소생시켜 온 힘, 그 영적 생명력을 찾으라.
아사나(asana)는 "편안함" 또는 "자리"로 번역되며, 오래 머무를 수 있는 편안한 좌법을 뜻한다. 몸을 다루는 이유는 명료하다. 몸은 이번 생에 우리가 거주하는 환경이고, 가라앉지 않은 몸은 끊임없이 주의를 낚아채 마음의 한곳 집중을 방해하며, 척추를 따라 에너지를 끌어올리려면 몸의 미세한 감각에 민감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합장이나 치켜든 주먹이 각각의 생각과 감정을 동반하듯, 몸 전체는 매 순간 하나의 진술을 하고 있다. 아사나는 몸의 진술을 가슴과 머리의 메시지와 일치시키는 작업이다.
같은 이유로 책은 하타 요가(hatha yoga)를 운동이나 몸 만들기로 접근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아름다운 몸을 목표로 삼으면 딱 그것만 얻는다. 요가로서 행하면 몸의 고요함, 민감함, 가벼움이라는 변형이 온다. 자세에 들어간 뒤에는 조각상처럼 그 자세 안에 완전히 중심을 잡고, "내가 아사나를 하고 있다"는 에고와의 동일시 없이 몸이 움직이는 것을 그저 지켜보라고 말한다.
To remain motionless for a long time without effort is an asana.
애씀 없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머무는 것이 아사나다. — «요가 다르샤나»
깨달음의 길에서 매 단계의 가장 큰 장애물은 우리 자신의 생각이다. 생각은 우리를 분리된 존재로 붙들어 두며, 합일에 대한 생각조차 합일 그 자체와는 전혀 다르다. 만트라(mantra)는 이 문제에 대한 기법적 해법이다. 온갖 방향에서 일렁이는 물결로 덮인 호수처럼 산란한 마음에, 의식적으로 하나의 인공 파도를 만들어 넣는 것이다. 하나의 생각을 골라 그것이 지배적이 되게 하면, 한 방향에서 오는 고른 파도가 모든 잔물결을 흡수한다. 다른 생각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들은 하늘의 구름처럼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내 생각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자기 생각과의 동일시를 끊는 것이 곧 내적 자유다.
책은 라마(RAMA) 만트라를 예로 든다. 라마야나의 완전한 카르마 요기이자 "참나(Atman)를 깨달았을 때의 당신의 본질"인 라마의 이름을 혀로, 다음에는 뇌로, 마침내 심장에서 울리게 하는 자파(japa, 신의 이름 반복)다. 흥미로운 전복은 마지막에 온다. 만트라를 "하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진실로는 만트라가 당신을 하고 있으며, 수행자는 그 손안의 수동적 악기가 된다.
a continuous sequence of even waves all coming from one direction overrides all the choppy water, as an ocean wave absorbs all the eddying waters at the shoreline.
한 방향에서 오는 고른 파도의 연속이 모든 일렁이는 물결을 압도한다. 바다의 파도가 해안선의 소용돌이치는 물살을 모두 흡수하듯이.
람 다스는 우주 전체를 프라나(pran)라 불리는 하나의 에너지로 본다. 몸도, 생각도, 빛도 진동의 속도와 폭이 다른 프라나의 형태일 뿐이며, 가장 미세한 차원에서 프라나·빛·의식은 같은 것의 다른 이름이다. 문제는 수행이 진행되어 집착이 풀릴수록 더 높은 진동의 에너지가 유입된다는 데 있다. 낡은 반응 습관의 회로로는 이 늘어난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다.
이때 두 갈래 전략이 있다. 아직 살아 있는 욕망의 충족을 피하고 그 에너지를 정화에 쓰는 길, 그리고 욕망을 의식적으로 다시 충족시키며 그 과정 전체를 지켜보아 욕망을 소진시키는 길이다. 후자는 좌도(ban marg)라 불리는 위험한 길로, 대부분은 실패하고 카르마(karma)만 늘린다고 책은 경고한다. 권장되는 것은 중도다. 낮은 차크라(chakra)를 자극하는 상황을 일부러 찾지도, 굳이 피하지도 않으면서, 마주칠 때마다 그 에너지를 연민으로 변환하는 것 — 이것이 "속된 것을 성스럽게 만드는" 신성한 작업이다.
As you feed in more energy, it is like feeding in a 220 current into a home that is wired for 110.
더 많은 에너지를 흘려 넣는 것은, 110볼트용으로 배선된 집에 220볼트 전류를 흘려 넣는 것과 같다.
호흡은 몸에 나타난 프라나(pran)의 대표적 형태이며, 호흡과 생각은 긴밀히 묶여 있어 어느 한쪽을 멈추면 다른 쪽도 멈춘다. 프라나야마(pranayam)는 훈련된 호흡 연습으로 생명 에너지를 다스리는 수행이다. 책은 고급 단계인 쿤달리니(kundalini) 각성 호흡에는 반드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선을 그은 뒤, 초심자가 바로 쓸 수 있는 절차를 상세히 적는다.
조건은 구체적이다. 공복 상태(식후 세 시간)에서, 이른 아침 정화 수행의 일부로, 척추를 곧게 세우고 항문과 회음부를 조이는 물라반다(muhlbandh)를 유지한 채 행한다. 연습은 세 가지다. 시탈리(sheetli)는 혀를 U자 홈 모양으로 내밀어 입으로 들이쉬고 코로 내쉬는 호흡으로, 첫날 다섯 번에서 하루 한 번씩 늘려 쉰 번까지 간다. 바스트리카(bhastrika)는 코로만 하는 빠르고 얕은 풀무 호흡을 30초 단위로 반복한다. 나리 소단(nari sodhan)은 좌우 콧구멍을 번갈아 막는 교호 호흡으로, 들숨 4초·멈춤 2초·날숨 8초의 리듬에 척추 좌우의 이다(ida)와 핑갈라(pingala)를 따라 에너지가 흐르는 심상을 함께 둔다. 딸꾹질이나 통증이 생기면 즉시 중단하고 한두 해 다른 요가에 집중하라는 안전 경고도 빠뜨리지 않는다.
When you calm your breath, there is simultaneous calming of the mind.
호흡을 고요하게 하면, 동시에 마음도 고요해진다.
몸에는 일곱 개의 정신 에너지 초점, 곧 차크라(chakra)가 있다. 1번은 생존, 2번은 성, 3번은 권력에 대응하며 이 셋은 에고를 유지·강화하는 데 쓰인다. 4번 가슴 차크라의 연민에서 비로소 에고를 넘어서는 영역이 시작된다. 프로이트를 2번 차크라의 대변인으로, 아들러를 3번, 융을 아마도 4번의 대변인으로 배치하는 대목은 이 책 특유의 재치 있는 사상사적 지도 그리기다.
강력한 성 에너지를 다루는 전략은 둘이다. 브라마차리아(brahmacharya)는 성적 금욕을 통해 에너지를 척추 위쪽 높은 차크라로 끌어올리는 길로, 제대로 행하는 이는 박탈감이 아니라 더 높고 지속적인 지복을 경험한다고 한다. 성적 탄트라(tantra)는 각성된 에너지를 영적 차원으로 돌리는 길인데, 전적인 진실과 신뢰, 카르마를 공유하겠다는 합의가 전제된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들의 정직함이다 — 이 책을 함께 만든 누구도 이 방법에 충분히 숙달되지 못해 더 확정적으로 쓸 수 없다고 고백한다. 장은 "사흘 전에는 나도 설탕을 끊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간디의 일화로 끝난다.
The spiritual path can be conceived, from an energy point of view, as the path up the spine … the purification of energy.
영적인 길은 에너지의 관점에서 보면 척추를 따라 올라가는 길 — 에너지의 정화 — 로 이해할 수 있다.
물 위를 걷는 예수와 의심하다 가라앉는 베드로의 이야기로 문을 여는 이 장은, 수행에서 얻어지는 초자연적 힘 — 싯디(siddhis) — 을 정면으로 다룬다. 마음이 한 점으로 모일수록 힘은 저절로 생긴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각 단계의 힘은 내면 사원의 문을 지키는 사자와 같아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 사나워진다. 힘으로 부를 얻고 명성을 얻는 순간 그 욕망의 지배력은 강해지고, 여정은 느려진다.
선을 행한다는 명분조차 안전하지 않다. "좋은 일"에 집착하는 이는 그 집착 때문에 무엇이 정말 이웃에게 좋은지 볼 수 없게 된다는 지적은 냉정하다. 규칙은 단순하다 — 어떤 힘을 쓸까 말까 망설여진다면, 쓰지 마라. 그리고 이 장의 절정은 "우주적 유머"다. 산을 옮기고 싶어 정화를 계속하면 언젠가 산을 옮길 수 있게 되지만, 그 자리에 이르려면 산을-옮기고-싶어-하던-자이기를 버려야 하고, 마침내 힘을 얻었을 때 당신은 애초에 산을 거기 놓은 자가 되어 있으므로 — 산은 그대로 있다.
If you are interested in powers, you’ll get them. That’s the trouble!
힘에 관심이 있다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바로 그게 문제다!
라마크리슈나의 비유가 이 장의 뼈대다. 어린 나무는 짐승에게 밟히지 않도록 울타리를 둘러 보호하지만, 다 자란 나무에는 울타리가 필요 없고 오히려 많은 이에게 그늘을 준다. 영적 성장도 같다. 막 깨어난 직후의 믿음은 흔들리기 쉬우므로, 이 시기에는 같은 믿음을 공유하는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사트상(satsang), 곧 상가(sangha)이며, 수도원과 아쉬람(ashram)이 존재하는 이유다.
길이 깊어지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성격이 바뀐다. 우정이든 결혼이든 동업이든, 새로 맺는 관계는 점차 서로의 사다나(sadhana)를 돕는다는 암묵적 — 마침내는 명시적 — 계약 위에 서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최종 상태가 아니다. 중심이 굳건해지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되면 어떤 무리와 함께 있어도 상관없어진다. 모든 존재가 의식의 진화 여정 위에 있으며, 다만 환영의 베일이 시야를 가리는 정도만 다르다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Bad company is loss, and good company is gain; In company with the wind the dust flies heavenwards; if it joins water, it becomes mud and sinks.
나쁜 벗은 손실이요 좋은 벗은 이득이다. 바람과 함께하면 먼지는 하늘로 오르지만, 물과 만나면 진흙이 되어 가라앉는다.
여정의 각 단계마다 "집을 정돈"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시금석은 감정이다. 사이가 나빴던 부모를 떠올릴 때 분노나 좌절, 자기연민이 인다면 아직 그 매듭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바로잡는다는 것은 화해의 제스처가 아니라 재지각이다 — 그 사람을 인격과 역할과 몸이라는 포장 너머, 나와 똑같이 진화의 어느 단계에 있는 영적 존재로 전적인 연민 속에서 다시 보는 일이다. 상대의 포장에 집착하는 한 나도 상대도 그 자리에 묶인다.
인도에서는 수행을 계속하려면 부모의 축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축복은 "너를 축복한다"는 말이 아니라, 단 한 순간이라도 서로를 동료 존재로 듣고 상대 안의 신성한 불꽃을 존중하는 것 — 지금 여기에서 공유된 한 초의 영원한 현재 — 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이 작업은 사람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좋아하던 음악, 싫어하던 음식, 피해 다니던 장소까지, 모든 낡은 애착이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Everything must be rerun through your compassion machine.
모든 것이 당신의 연민의 기계를 다시 통과해야 한다.
거짓말의 역학에 대한 분석이 이 장의 출발점이다. 누군가에게 거짓말을 하려면 그 사람을 "그" 또는 "그들", 곧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 거짓이 만들어 내는 이 거리감은 결국 거짓으로 얻은 것보다 더 큰 비용을 치르게 한다. 카르마의 작동을 이해하면, 에고를 위해 행한 행위의 결과에서 벗어날 길이 없음이 보인다.
책이 제안하는 성찰은 구체적이다. 자신이 유지해 온 거짓이나 반쪽 진실 하나를 떠올리고 그 부식성 부작용을 관찰한 뒤, 진실이 "알려진다면"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루(guru)는 — 아직 그 현현한 모습을 만나지 못했더라도 — 이미 당신에 관한 모든 것을 알며, 그럼에도 당신의 곤경에 연민을 갖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한다. 영의 문제에서 당신은 전혀 취약하지 않다. 그렇다면 진실이 어떻게 당신을 해칠 수 있겠는가.
Truth gets you high. There is no doubt about it. Lies bring you down.
진실은 당신을 드높인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거짓은 당신을 끌어내린다.
사회에서 빠져나와야만 수행이 가능한가 — 1960년대의 청년이라면 누구나 품었을 물음에 대한 답이다. 책의 답은 명확하다. 진짜 드롭 아웃은 제도가 아니라 집착에서 빠져나오는 내면의 일이며, 제도만 떠나는 이탈은 곧 새로운 제도와 새로운 덫을 만들 뿐이라는 것이다. 시위와 사회 참여도 부정되지 않는다. 다만 "우리와 그들"이라는 양극화 대신, 반대하는 상대 안에서 같은 자리를 보는 의식적 참여가 조건으로 붙는다.
Certainly you must drop out . . . but the drop-out is internal, not external. One drops out of one’s attachments.
물론 그대는 드롭 아웃해야 한다 … 그러나 그 이탈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다. 빠져나와야 할 곳은 자기 자신의 집착이다.
돈을 죄악시하지도 미화하지도 않는 것이 이 장의 균형 감각이다. 돈은 하나의 에너지이며, 모든 에너지에는 저마다의 진동이 실려 있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생계를 얻는 방식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곧 자신에게 돌아온다. 따라서 생계 수단은 그 본성상 세상의 편집증과 분리를 키우는 것 — 기만적이거나 착취적인 사업 — 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직업은 그 자체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의식 수준이다. 수행이 진행되면 직업을 바꿔야 할 수도 있고, 지금 직업을 수행하는 방식만 바꾸면 될 수도 있다. 의식이 깊어질수록 어떤 직업이든 빛을 퍼뜨리는 수레가 된다. 다음에 만날 붓다의 성품을 지닌 존재는 버스 기사, 의사, 직조공, 보험 판매원의 모습일 수 있으며, 버스에 오르며 잔돈을 건네는 단순한 춤 속에서 인간의 신성에 대한 믿음이 강해질 것이다.
Money is “green energy.” And any energy you work with brings with it its own vibrations.
돈은 "초록빛 에너지"다. 그리고 당신이 다루는 모든 에너지는 저마다의 진동을 함께 가져온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크리슈나는 말한다 — 무엇을 하든 하되, 행위의 열매를 나에게 바치라. 일상을 이루는 재료 전부를 합일의 수레로 쓰는 것이 카르마 요가(karma yoga)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면서 동시에 가장 어려운 요가인데, 에고를 위해 시작한 행위의 동기를 에고를 넘어선 것을 향한 봉사로 전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핵심 기법은 모든 행위에 "제3의 초점"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도랑을 파는 나와 파이는 도랑 외에, 그 행위를 지켜보는 깨달은 존재 — 크리슈나, 붓다, 그리스도 — 의 눈을 통해 장면 전체를 돌려 보면, "내가 도랑을 판다"는 에고 중심의 곤경에서 풀려나 그저 도랑이 파이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장의 백미는 구르지예프(Gurdjieff)의 "자기 기억"에서 가져온 목격자(witness) 기법의 세밀한 묘사다. 목격자는 평가하지 않고 다만 기록한다. 길을 걷다 짜증나는 일을 만나 목격자를 잃고, 한참 뒤에야 잊었음을 기억하고, 다음에는 분노의 한가운데서 깨어나고, 마침내 분노가 일어나려는 순간 "아, 화가 나려 하는군" 하고 알아차려 그 에너지가 스스로 힘을 잃는 — 수천 번의 경험을 거치는 점진적 과정이 정직하게 그려진다. 수단은 이원적이지만 목표는 비이원적이다. 삼사라(samsara)의 바다를 건너면 배는 두고 간다.
If you can serve a cup of tea right, you can do anything.
차 한 잔을 제대로 대접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박티 요가(bhakti yoga)는 사랑과 헌신을 통해, 가슴을 통해 합일에 이르는 길이다. 모든 사람에게 언제 어디서나 가장 가까이 있는 요가다. 처음에는 나와 분리된 대상을 사랑하는 이원적 방법이지만, 종착지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가 하나로 녹아드는 비이원이다. 이 장의 아름다운 재해석 하나 — "사랑에 빠졌다"는 말은 상대가 내 가슴, 곧 내가 사랑 그 자체인 자리를 여는 열쇠였다는 뜻이다. 열쇠를 소유하려는 순간 열쇠를 잃는다.
전통적 형식은 노래·춤·찬팅·기도다. 특히 키르탄(kirtan) — 신의 이름들을 반복해 부르는 노래 — 은 단순한 선율을 두 시간이고 다섯 시간이고 반복하는 동안 겹겹이 열리는 체험을 준다. 인도의 마을에서 남자들이 저녁마다 둘러앉아 하르모니움과 타블라에 맞춰 크리슈나와 람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바잔(bhajan)의 풍경이 소개되는데, 거기서 존중받는 것은 목소리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부르는 이의 영혼의 순수함이라는 관찰이 인상적이다.
God respects me when I work / But he loves me when I sing.
신은 내가 일할 때 나를 존중하지만, 내가 노래할 때 나를 사랑한다.
요가에서 명상은 공상이나 숙고가 아니라, 마음을 한 점으로 모으고 마침내 마음의 회전을 완전히 멈추는 훈련된 과정이다. 생각이 우주를 만들어 내는 한, 마음이 완전히 고요해질 때까지 우리는 환영 속에 머문다. 책의 입문 지침은 놀랄 만큼 구체적이다. 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자리를 찾고, 30분간 움직이지 않을 수 있는 자세로 앉아, 첫 주에는 그저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지켜보기만 한다.
그다음 단계가 남방불교의 사티파타나 위파사나(satipatthana vipassana), 곧 "순수한 주의(bare attention)"다. 호흡에 따라 오르내리는 복부 근육에 주의를 두고 "오름… 내림…"이라 이름 붙이며, 마음이 떠돌면 어디로 갔는지 기록한 뒤 다시 돌아온다. 생각을 억누르는 것도 하나의 생각이므로, 억누르지 말고 이름만 붙이라는 지침이 핵심이다. 이어서 촛불을 그저 바라보는 트라탁(tratak), 내면의 소리를 하나씩 따라 올라가는 나다 요가(nad yoga)가 소개된다 — 소리의 사다리를 오르는 기법이다.
There are no impediments to meditation. The very thought of such obstacles is the greatest impediment.
명상에는 장애물이 없다. 그런 장애물이 있다는 생각 자체가 가장 큰 장애물이다.
이성은 인간에게 달 착륙과 대도시를 주었지만, 전쟁과 공해와 신경증도 함께 주었다. 진화적 관점에서 이성은 우리를 어느 지점까지만 데려가며, 큰 바다를 건너려면 그것을 초월해야 한다. 그러나 한계를 안다고 도구를 버리는 것은 아니다. 이성으로 이성을 초월하는 길이 있으니, 곧 추론과 식별을 통한 앎의 길, 즈냐나 요가(jnana yoga)다. 이성의 정확한 한계는 이렇다 — 이성은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을 분리해야만 작동하고, 역설을 다룰 수 없으며, 주관적으로만 경험되는 것을 알 수 없다.
이 길의 마지막 덫은 "모든 것을 알면서 여전히 아는 자로 남고 싶은 욕망"이다. 유한한 지식을 아무리 쌓아도 무한이 되지는 않으므로, 마지막 걸음에서는 아는 자가 사라져야 한다. 이를 위한 연습이 라마나 마하르시의 "나는 누구인가(Who am I?)" — 비차라 아트마(vichara atma)다. 몸도, 다섯 운동기관도, 다섯 감각기관도, 내부 장기도, 생각도 아닌 "나"를 하나씩 벗겨 가다, 마지막에는 머릿속에 두었던 '나'라는 생각마저 내려놓는다.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올라가 그 가지를 잘라 내는 것과 같다고 책은 말한다.
You can only BE it all, but you can’t know it all.
당신은 전체가 될 수는 있어도, 전체를 알 수는 없다.
책 제목의 요체가 담긴 이 장은 거의 전부가 연습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라 — 나는 어디에 있는가? 답은 언제나 "여기"다. 지금은 몇 시인가? 답은 언제나 "지금"이다. 들릴 때까지 반복하라. 알람을 맞추고 벽에 쪽지를 붙여, 하루에도 몇 번씩 일상 한가운데서 이 두 질문과 마주치게 하라. 어디를 가든, 시계가 몇 시를 가리키든, 우리는 "여기와 지금"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시계와 지구는 제 일을 하게 두고, 당신은 영원한 현재에 머무르라는 것이다.
이 장은 현재에 머무는 것이 무책임이 아님을 역설로 보여 준다. 진정으로 지금 여기에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매 순간 최선의 행동을 할 최적의 힘과 이해를 갖게 된다. 미래를 계획하는 일조차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다 — 다만 "그때"가 "지금"이 되었을 때 온전히 현존한다면. 역설처럼 들리는가? 물론이다. 계속 숙고하라고 책은 답한다.
Ask yourself: Where am I? Answer: Here. Ask yourself: What time is it? Answer: Now.
스스로에게 물어라: 나는 어디에 있는가? 답: 여기. 스스로에게 물어라: 지금은 몇 시인가? 답: 지금.
사이키델릭으로 시작한 저자가 사이키델릭을 어떻게 정리하는가 —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정직한 대차대조표에 해당하는 장이다. 우파야(upaya)는 "방편"이라는 뜻으로, 약물은 여러 방편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그것도 유한한 방편이라는 것이 결론이다. 갇힌 세계관을 깨뜨리는 충격,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주는 짧은 엿봄 같은 효용을 인정하면서도, 결국 내려와야 한다는 것, 경험이 외부 물질에 의존하는 한 "나는 아직 부족하다"는 느낌이 강화된다는 것, "높이 오르는 것"에 대한 집착 자체가 막다른 골목이 된다는 것을 조목조목 짚는다.
The goal of the path is to BE high, not GET high.
길의 목표는 높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높이 '있는' 것이다.
요리책의 후반부를 여는 이 장은 수행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덫이 될 수 있다는 경고로 시작한다. 사다나(sadhana)는 롤러코스터와 같아서, 새로운 고양 뒤에는 대개 새로운 침체가 따라온다. 첫 각성의 도취가 지나가면 은총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상실감이 찾아오는데, 저자는 이를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한 "영혼의 어두운 밤"에 견준다. 정화가 진행될수록 자신의 불순물이 오히려 더 크고 거칠게 보이는 역설도 다룬다. 더 깊이 붙잡힌 것이 아니라 더 선명하게 보게 된 것뿐이며, 안쪽 사원으로 갈수록 문을 지키는 사자가 사나워지듯 빛도 함께 밝아진다는 것이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사트바의 덫", 곧 순수함의 덫에 대한 경고다. 모든 것을 올바르게 하면서 자신의 순수함에 도취되는 상태를 인도에서는 "황금 사슬"이라 부른다. 쇠사슬이 아니라도 사슬은 사슬이라는 것이다. 깨달음은 번쩍하는 즉각적 사건이 아니라 구름층이 서서히 얇아지는 점진적 과정으로 그려지며, 명상으로 물러나는 시기와 시장으로 나아가는 시기가 번갈아 오는 "안팎의 순환"도 수행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장 끝에는 라마크리슈나, 비베카난다, 장자 등의 "강력한 인용문(Potent Quotes)" 모음이 붙어, 이 지도가 여러 전통에서 공통으로 확인된 지형임을 보여준다.
At first you will think of your sadhana as a limited part of your life. In time you will come to realize that everything you do is part of your sadhana.
처음에는 사다나를 삶의 한정된 일부로 여길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사다나의 일부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음이 고요해질수록 안팎에서 작용하는 힘들에 민감해지고, 자극이 적은 환경을 자연스레 찾게 된다. 그러나 저자는 서구인이 곧장 요기의 동굴로 들어가는 것을 만류한다. 밀라레파(Milarepa)식 은둔을 흉내 내는 일은 미묘한 에고의 여행이 되기 쉬우므로, 지금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해 삶의 방식이 천천히 자연스럽게 바뀌도록 두라는 것이다. 나방이 불꽃에 끌리듯, 빛이 스스로 당신을 끌어당기게 하라는 이미지가 쓰인다. 구체적 첫걸음은 소박하다. 집 한구석에 "옴 홈(Om Home)" — 무한을 향한 발사대 — 을 만드는 것이다. 방석 하나, 촛불, 향, 존경하는 존재의 사진이면 충분하다.
장의 나머지는 자극의 스펙트럼 반대편, 곧 전면적 규율의 세계를 보여준다. 캘리포니아의 선(Zen) 수행처 타사하라(Tassajara)의 하루가 새벽 4시 기상종부터 밤 9시 반 소등까지 분 단위로 소개된다. 좌선(zazen)과 걷기 명상 킨힌(kinhin), 세 개의 그릇으로 이루어진 오료키(oryoki) 식사 의례까지, 모든 동작이 주의를 모으는 장치다. 이어 람 다스가 몸담았던 라마 재단(Lama Foundation)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적 공동체의 설계도가 제시된다. 생활을 담당하는 베이스캠프와 홀로 침묵하는 은둔처(hermitage)의 이중 구조, 명시적 계약과 자발적 참여, 그리고 이사할 때 부엌보다 명상실을 먼저 꾸미라는 조언이 그것이다. 구조는 무겁지만 분위기까지 무거울 필요는 없으며, 가벼운 기쁨의 스타일이야말로 공동체를 지탱한다고 덧붙인다.
Just as water wears away stone, so daily sadhana will thin the veil of avidya (ignorance).
물이 돌을 닳게 하듯, 날마다의 사다나는 아비디야(avidya), 곧 무지의 장막을 얇게 만들 것이다.
1970년대 서구에서 가족 단위의 수행은 가장 어려운 길로 진단된다. 산업혁명과 화폐 경제가 영적·심리적 결합체로서의 가족을 사실상 해체했고, 구성원들은 흩어져 "경제와 취침의 단위"로만 함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학교와 보육 기관은 아이를 기존 사회의 "좋은 구성원"으로 길러낼 뿐, 영적 토대를 줄 수 없다. 전망은 어둡지만, 저자는 지난 십 년 사이 일어난 영적 부흥 — 그가 반쯤 농담처럼 열거하는 원인은 환각제, 원자폭탄, 로큰롤, 동양에서 온 스승들, 그리고 문명 한가운데의 공허다 — 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고 본다.
출발점은 어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영(spirit)은 라틴어로 숨(breath)을 뜻한다. 숨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것(no thing)"이 삶 전체의 토대이며, 가족 사다나는 가족의 모든 것을 이 영에 바치는 데서 시작한다. 그다음은 지극히 현실적인 점검이다. 바지는 몇 벌이 필요한가, 어떤 음식과 어떤 집이 필요한가 — 욕망이나 환상이 아니라 진짜 필요를 따져보라는 것이다. 영성과 살림살이를 한 문장 안에 놓는 이 감각이 장 전체의 개성이다.
The family and all it is thru/by/in extension must be dedicated solely to the spirit.
가족과, 가족에 딸리고 가족으로부터 뻗어 나가는 모든 것은 오직 영(靈)에 바쳐져야 한다.
이 장은 가족 사다나의 각론이다. 수입이 줄어도 되는가, 줄이지 않아도 되는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해, 지금의 생계를 영적 작업에 맞출 수 없다면 자급 경제로의 전환을 권한다.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게, 딱 살아갈 만큼. 낡은 농장을 사거나 작은 공방을 차리라는 제안의 이유는 소박하다. 그런 곳에서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에게 할 일이 있고, 가족이 함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과 시간과 공간을 나누는 동안 신뢰와 열림이 자라고, 가족은 하나의 심리적 유기체가 되어 간다.
환경이 마련되면 집 전체를 성소로 바꾼다. 박티(bhakti) 성향이면 성화(聖畵)로 벽을 채우고, 선(Zen)에 가깝다면 무(無)를 반영하는 식으로 — 어떤 길이든 온 환경이 그 길을 뒷받침하게 하라는 것이다. 매일 같은 시각에 일어나 함께 명상하고, 모든 음식과 행위를 영에 바치는 규칙적 일과가 이어진다. 부부는 서로에게서 신성을 보고 — 시바와 샥티(Shiva-Shakti), 해와 달 같은 결혼의 모델들이 열거된다 — 아이들은 참된 고향에서 갓 도착한 스승으로 존중된다. 다만 저자는 냉정하게 못 박는다. 하루 10분, 20분씩 영을 "끼워 넣는" 일정 조정으로는 되지 않으며, 결국 전부 아니면 전무라고. 그래서 비슷한 뜻을 가진 가족들이 모이는 영적 공동체가 현실적 대안으로 제시된다.
The work is clear and definite. Jesus was a carpenter. Gandhi spun.
그 일은 명료하고 분명하다. 예수는 목수였다. 간디는 물레를 돌렸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는 유연함이라는 선물이 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소리 내어 만트라를 외고, 종을 울리고, 단식을 하고, 말총 매트리스 맛이 나는 특별식을 먹어도 아무도 방해받지 않는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없는 "따뜻한 침묵의 고치" 속에서 지낼 수도 있다. 저자는 목격자(witness) 훈련을 위한 유쾌한 방법도 소개한다. 자신의 행동을 3인칭으로 중계하는 것이다 — "그는 지금 냉장고로 향하고 있다. 아이스크림을 먹을까 생각 중이다. 대신 프라나야마를 하기로 했다." 이런 실황 중계는 목격자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이상적인 룸메이트가 되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는 농담이 붙는다.
그러나 혼자 사는 이는 모든 길 중 가장 어려운 카르마 요가(karma yoga)를 연습할 기회가 적다. 부대끼며 사는 데서 오는 탄력성이 길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역 센터에서 가르치는 일처럼 깊은 수준의 상호작용이 있는 활동으로 균형을 잡으라고 권한다. 장은 고독의 재정의로 끝난다. 문을 닫고 방을 어둡게 하고 안을 들여다보면, 문은 열려 있고 불은 켜져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Solitude does not mean that you are really living alone, even if you seem to be living alone.
고독은 당신이 정말로 혼자 살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설령 혼자 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요리책의 마지막 장은 죽음을 수행의 바깥이 아니라 한가운데에 놓는다. 문을 여는 것은 간디의 일화다. 네 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 간디는 "람(RAM)"이라는 신의 이름을 불렀고, 인도의 리시(rishi)들은 신의 이름을 부르며 죽는 이는 곧바로 "저 너머의 너머"로 간다고 말한다. 이 장의 핵심 제안은 죽음을 미리 연습하라는 것이다. 불교의 명상 수행, 영원의 관점(sub specie aeternitatis)에서 삶을 보는 그리스도교 관상,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이 모두 자기 죽음을 통과하는 훈련으로 소개된다.
가장 길게 인용되는 것은 라우라 헉슬리(Laura Huxley)의 심리적 죽음 연습이다. 어두운 방에 누워 자기 몸이 이미 죽었다고 상상하고, 자신의 장례식 — "마지막 파티" — 에서 울고 소리치고 다 쏟아낸 뒤, 사랑받지 못했던 자기 자신에게 마침내 사랑의 행위를 하고, 그 존중과 사랑의 감정을 지닌 채 살아 있는 몸으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티베트 사자의 서»와 «이집트 사자의 서»는 죽어감이라는 에너지 변환의 춤을 안내하는 오래된 매뉴얼로 소개되고, 매 순간의 놓아버림 — 목표, 자아상, 통제욕을 내려놓고 "함(DO)" 대신 "있음(BE)"으로 돌아가는 일 — 이 곧 작은 죽음이자 재탄생으로 읽힌다. 자살은 이와 정반대로, 에고에 대한 집착의 표현이므로 해방이 아니라 속박이라는 구분도 분명히 한다.
후반부는 타인의 죽음 곁에 있는 법을 다룬다. 죽어가는 이와 의식을 나누며 그가 의식적으로 죽도록 돕는 일은 보살(Bodhisattva) 역할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으로, 오히려 찾아 나서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함께 명상하고, 존재로만 가르치고, 물을 때에만 진실을 말하고, 죽어가는 사람 안에서 영원한 것만을 보라는 구체적 지침이 이어진다. 그리고 산과 바다 가까이에 "죽어가는 이들과 태어나는 이들을 위한 센터"가 세워지는 날을 꿈꾸는 대목이 나온다. 이 문장은 훗날 현실이 된다. 람 다스는 1980년대 초 스티븐 레빈 등과 함께 죽어가는 이들을 동반하는 임종 프로젝트(Dying Project)를 시작했고, 의식적 죽음은 만년의 그를 대표하는 주제가 되었다. 장은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아일랜드(Island)» 속 임종 장면 — "가볍게, 가볍게" 맑은 빛 속으로 몸을 놓아 보내는 장면 — 으로 닫힌다.
You must live before you can die. But you must die before you can live. Live consciously! Die consciously!
죽을 수 있으려면 먼저 살아야 한다. 그러나 살 수 있으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 의식적으로 살라! 의식적으로 죽으라!
책의 마지막 부는 추천 도서 목록이지만, 그 제목부터가 목록에 대한 경고다. "그림의 떡(painted cakes)은 배고픔을 달래지 못한다"는 선(禪)의 오랜 격언 — 한자 문화권에서 화중지병(畵中之餠)으로 알려진, 그림의 떡은 굶주림을 채울 수 없다는 말 — 에서 온 제목이다. 도겐(Dogen) 선사가 같은 화두를 뒤집어 사유했을 만큼 선불교에서 유서 깊은 이 이미지는, 여기서 명료한 하나의 뜻으로 쓰인다. 책은 지도일 뿐 영토가 아니고, 메뉴판일 뿐 식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깨달음에 관한 문장을 아무리 읽어도 그것이 깨달음은 아니며, 독서는 수행을 대신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경고 바로 뒤에 수백 권의 책 목록이 이어진다는 사실이 이 부의 매력적인 역설이다. 지도가 영토는 아니지만, 길 떠나는 이에게 지도는 여전히 요긴하다. 람 다스는 목록을 세 층위로 나눈다. 늘 곁에 두고 벗처럼 지낼 책, 이따금 찾아갈 책, 그리고 한 번 만나 두면 좋은 책. 경전과 성인전에서 헤세의 소설과 공상과학까지 아우르는 이 목록은 1970년대 초 미국 대항문화가 실제로 읽던 영적 서가의 스냅사진이기도 하다. 다만 순서를 잊지 말라는 것이 제목의 당부다. 떡 그림을 아무리 모아도, 떡은 부엌 — 곧 요리책의 수행 — 에서만 나온다.
"함께 어울려 지낼 책"이라는 제목 그대로, 읽고 치우는 책이 아니라 평생 곁에 두고 거듭 돌아갈 원전들이다. «바가바드 기타»는 여러 번역본이 나란히 소개될 만큼 목록의 중심에 있고, 킹 제임스 성경, «담마파다», «우파니샤드», 노자의 «도덕경», «주역», 에반스-웬츠의 티베트 총서가 그 곁에 놓인다. 라마크리슈나의 복음, 라마나 마하르시의 대화록, 메허 바바의 강론, 요가난다의 자서전처럼 살아 있는 스승들의 육성을 담은 책들도 이 층위에 속한다. 힌두교, 불교, 도교, 그리스도교, 수피즘이 한 서가에 나란히 꽂히는 구성 자체가 이 책의 절충주의를 보여준다.
매일 곁에 둘 필요는 없지만 때때로 방문할 가치가 있는 책들이다. 루미의 강론, 오로빈도의 잠언, 블레이크와 릴케와 휘트먼의 시, 테야르 드 샤르댕의 진화 신학, 구르지예프와 우스펜스키의 "제4의 길", 토머스 머튼의 수도원 일기, «블랙 엘크는 말한다», 소로의 «월든», 헤세의 «싯다르타»와 «동방순례»가 이 층위에 있다. 원전 목록에는 그 아래 한 단계, "한 번 만나 두면 좋은 책(Books It's Useful to Have Met)"도 있는데, 여기에는 카스타네다와 부버, 키르케고르뿐 아니라 톨킨과 하인라인, 아시모프의 소설까지 포함된다. 영적 서가가 SF와 판타지까지 뻗는 이 너비가 1971년이라는 시대의 표정이다.
후속 쇄를 거치며 목록 끝에 덧붙은 짧은 갱신 기록이다. 사트 프렘의 오로빈도 평전, 루미의 «마스나비», 하즈라트 이나야트 칸의 «수피 메시지», 순류 스즈키의 «선심초심(Zen Mind, Beginner's Mind)», 시르디 사이 바바의 전기가 추가되었다. 목록 뒤에는 새뮤얼 와이저, 샴발라, 보리수(Bodhi Tree) 같은 동양·신비주의 전문 서점들의 주소가 이어지는데, 인터넷 이전 시대에 이런 책을 구하는 일 자체가 하나의 순례였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료다. 책이 살아 있는 문서처럼 자라났다는 점에서, 이 부록은 «Be Here Now»가 완결된 경전이 아니라 계속 움직이는 공동체의 기록이었음을 증언한다.
1971년 이후 람 다스(Ram Dass)의 삶은 책이 설파한 "봉사(seva)"를 제도로 옮기는 과정이었다. 그는 1970년대 중반 하누만 재단(Hanuman Foundation)을 세워 수감자들에게 명상과 요가를 전하는 교도소 아쉬람 프로젝트(Prison-Ashram Project)를 지원했고, 죽어 가는 이들을 의식적으로 동반하는 임종 프로젝트(Dying Project)를 이끌었다. 1978년에는 개발도상국의 실명 예방과 보건 사업을 펴는 세바 재단(Seva Foundation)을 공동 설립했다.
1997년 2월의 뇌졸중은 그의 언어와 몸 절반을 앗아 갔지만, 그는 이 사건을 "혹독한 은총(fierce grace)"이라 부르며 노화와 죽음을 다룬 «Still Here»(2000)를 펴냈다. 만년에는 하와이 마우이에 정착해 가르침을 이어 갔고, 2019년 12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는 러브 서브 리멤버 재단(Love Serve Remember Foundation)이 강연 아카이브와 출판을 통해 그의 유산을 관리하고 있다.
We all die in each moment . . . and we are all born in each moment.
우리는 매 순간 죽고 . . . 또한 매 순간 태어난다.
«Be Here Now»는 출간 이후 한 번도 절판되지 않은 채 200만 부 이상 팔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동양 영성을 다룬 영어권 서적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힌 책의 하나로 꼽힌다. 젊은 시절의 스티브 잡스는 이 책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고, 조지 해리슨은 1973년 앨범 «Living in the Material World»에 책 제목을 그대로 딴 곡 "Be Here Now"를 실었다.
더 넓게 보면 이 책은 요가·명상·마음챙김이 소수 구도자의 전유물에서 대중문화의 일부로 옮겨 가는 길목에 서 있다. "지금 여기"라는 구호가 오늘날 광고 문안이 될 만큼 흔해진 데에는, 이 네모난 보라색 책이 만든 어휘의 힘이 적지 않다.
Don’t think about the future. Just be here now.
미래를 생각하지 마라. 그저 지금 여기에 있어라.
이 책을 둘러싼 논쟁도 기록해 둘 필요가 있다. 사이키델릭 체험에서 출발한 영성이라는 태생은 처음부터 논란거리였다. 약물이 연 문을 수행이 이어받는다는 서사는 어떤 이들에게 해방의 증언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위험한 지름길의 낭만화로 읽혔다. 또한 후대의 연구자들은 힌두교와 불교의 개념을 서구 독자의 입맛에 맞게 번역·절충하는 과정에서 전통의 맥락이 탈색되었다는 점, 이른바 문화적 전유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왔다.
그럼에도 이 책이 유지하는 위치가 있다. 저자는 자신을 완성자가 아니라 "길 위의 초심자"로 소개하며, 배운 것을 나누는 일 자체를 수행의 일부로 규정한다. 확신에 찬 교조가 아니라 한 사람의 정직한 실험 보고라는 점, 그것이 비판을 통과하고도 이 책이 살아남은 이유에 가깝다.
The sharing is part of the work. The listening is part of the work. We are all on the path.
나누는 것도 수행의 일부이고, 듣는 것도 수행의 일부다. 우리는 모두 길 위에 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이 책을 1960년대 반문화의 유물로만 읽는 것은 가장 재미없는 독법이다. 사이키델릭의 유행도, 인도행 히피 순례도 지나갔지만, 책이 붙들고 있는 질문은 지나가지 않았다. 그 질문은 "주의(attention)를 어디에 둘 것인가"이다.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계산에 저당 잡힌 주의를 지금 이 순간으로 되돌리는 일, 스마트폰의 시대에 이 문제는 1971년보다 오히려 절실해졌다.
그렇게 읽으면 이 책의 세 부분은 하나의 실험 설계로 다시 보인다. 1부는 한 심리학자가 자기 주의의 습관을 해체한 기록이고, 2부는 주의가 달라졌을 때 세계가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한 시각적 보고이며, 3부는 그 상태를 약물 없이 재현하기 위한 절차서다. 믿음을 요구하는 책이 아니라, 각자 검증해 보라고 내미는 책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 실험에 한 가지 태도를 당부한다. 너무 심각해지지 말 것.
Cosmic humor, especially about your own predicament, is an important part of your journey.
우주적 유머, 특히 자기 자신의 곤경에 대한 유머는 여정의 중요한 일부다.